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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출내기시인방

논픽션 당선작- 만남의 노래


 

(국제신문 논픽션 당선작)

만남의 노래 / 안 윤 주


<상편>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를 든 나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 목소리는 분명 낯선 여자의 음성이었다. 왠지 어색한 말투로 나를 찾고 있었다.

"저가 안윤주입니다만, 누구십니까?"전화 속의 여자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수줍은 듯 자기 신분을 밝혔다."이게 누군가? 영순씨!"나를 긴장하게 만든 낯선 여자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생 영순 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나의 사촌 형님을 만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어, 그래 영순씨! 정말 오랜만입니다."나도 모르게 존대 말로 응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졸업 이후 벌써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내 나이 42세,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있지 않은가.

▶ 연락처 수소문 동창명부 작성

그동안 만나보기는커녕 소식 한번 나눈 일도 없었다.

서로의 안부를 엉겁결에 교환하고 언젠가 한번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통화를 끝냈다. 그런데 이를 어찌할꼬. 내 가슴은 뛰고 있었고 그동안 허둥대던 세월 속에 묻혀버렸던 추억들이 내 고향 언덕 빼기의 새싹처럼 긴 침묵을 깨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첩첩 산골 아담하게 자리 잡은 교정에서 까아만 고무신을 손에 들고 달리기하던 친구, 몹시도 추운 겨울날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 몸을 녹이던 손등이 까만 친구도 생각났다.

나는 어느 사이 자신도 모르게 고향 산천을 누비며 추억의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며칠 후 나를 찾아온 중년부인들이 있었다. 전화를 해왔던 영순이, 어릴 적 달리기 선수였던 숙희, 얌전한 소녀로만 기억되는 춘호였다. 너무 오랜만의 만남이라 어설픈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들 오가다 마주치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다.

뚱뚱했던 단발머리 소녀가 날씬한 아줌마로, 갸름했던 긴 머리 소녀가 풍만한 중년부인으로 변해 있었다. 눈가의 잔주름들이 긴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며 친구들의 안부를 챙기며 숱한 말을 나누다보니 우리들은 어린 옛날로 돌아가 추억의 조각들을 주워 모아 아름다운 옛 그림을 맞추고 있었다.

누구의 입에선가 우리도 동기동창회를 한번 하자고 제안했다. 선배님들은 동기회를 아주 재미있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동기생은 남자 친구들이 못나서 아직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불평들이 대단했다. 내가 책임지고 주선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깊은 생각도 없이 약속을 하고 말았다. 숱한 이야기들을 나눈 후에 그들은 돌아갔다.

동기동창회! 그래, 모두들 어떻게 변했을까? 무얼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다시 만나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 소풍가는 날 기다리는 심정

나는 그동안 가끔씩 소식을 전하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동기회를 열어보자고 제안했더니 모두들 대환영이었다. 나는 그 날부터 동기회를 열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동네별로 친구들의 연락처를 파악하여 명부를 만들었다. 많은 시간이 걸려서야 1차 명부가

작성되었다. 총 동창생 120명 중 41명이 확인되었다. 부산에 거주하는 친구에서부터 서울 대구, 그리고 고향을 지키는 친구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수소문했다. 연락을 받은 친구들은 모두들 반가워했고 동기회에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서부터 우리들의 만남의 노래는 시작되었다.


어설픈 나래 짓으로

둥지를 떠나 헤어진 지 어언 30년

가슴마다에 그리움이 있습니다.

만남의 설렘이 있습니다.

빛바랜 추억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둥지를 엮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나는 정성을 다해 모두에게 편리한 날짜와 약도까지 담은 안내장을 만날 날짜보다 보름이나 앞당겨 발송했다. 또 수시로 전화 연락도 하는 등 첫 만남을 위한 준비를 적극적으로 했다. 동기회 회칙의 초안도 작성했다.

제1조(명칭) 본회는 중산초등학교 제20회 동기회라 정한다.

제2조(목적) 본회는 회원 상호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우정을 돈독히 하고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며 생활의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는 모임의 장으로 발전시킴에 목적을 둔다....

'나는 첫 만남의 의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 노력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물론 여러 친구들과의 협의도 빠뜨리지 않았다. 초대 회장단구성도 내정되었다.

첫 만남의 날짜를 앞둔 시간들은 초등학교 시절 소풍 가는 날을 기다리던 심정과 같았다.

마침내 만남의 그 날이 왔다. 나는 약속 1시간 전에 도착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들을 기다렸다. 많이 참석하여야 할텐데.... 나의 머리 속은 기대와 걱정이 뒤엉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드디어 한 친구가 도착했다. 반백의 머리에 배불뚝이가 된 용수, 첫인상이 사장님 같았다. 그는 여유 있는 몸짓으로 악수를 청해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데 친구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요즘 흔히들 한다는 성형수술을 했는지 몰라보게 예쁘진 순자, 씨름선수 같은 몸으로 땀을 훔치며 나타난 병기, 검은 안경테가 잘 어울리는 여장부 같은 석순이, 맨 앞자리 차지였던 덕기는 아직도 하얀 얼굴이 역시 동안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하늘을 날아서 도착한 판용이.... 모두들 조금은 흥분된 표정으로 서로를 살피기에 바빴다.

첫 만남의 자리는 소란스러웠고 어수선하기까지 했다. 이럴 때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야단쳐 조용히 시킬텐데, 문득 선생님의 옛 모습이 스쳐갔다.

오고가는 말들 속에서도 아주 오랜만에 듣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이고 가시내야" "이 머슴아들아"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들인지 몰랐다.

30년은 젊어지는 순간이었다. 손을 잡고 놓을 줄 모르는 친구, 서로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 모르는 녀석, 서로를 불러대는 소리, 정말 한바탕 대혼란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참석자를 확인해 보니 34명이었다. 41명 중 34명, 대단히 높은 참석률이었다. 나는 신이 났다. 이쯤에서 마이크를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회의 진행을 맡을 회장이 없으니 주선한 내가 모임을 이끌어야했다. 나는 들뜬 분위기를 잠시 진정시킨 후 인사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을 왜 진작 만나지 못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앞섭니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의 의미에서라도 앞으로는 자주 만나 목적이 뚜렷한 모임으로 발전시켜 나갑시다. 참석하지 못한 그리운 친구들은 우리 모두 수소문해서 차기 모임에는 전원이 참석할 수 있게끔 하여 우리들의 결속력을 증명해 보입시다. 오늘 즐겁고 보람된 만남이 되시길 바랍니다."이런 요지의 나의 서투른 인사말이 끝나자 친구들은 큰 박수로 그동안 모임을 주선한 데 대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식사를 하는 동안 친구들을 한사람씩 소개했다.


▶ 교수·의사·회사중역으로 변신

"웅동에 김용수씨, 당당히 사장님으로 변신해서 우리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릴 적 빨간 모자 달린 스펀지 잠바가 어울리던 박영희씨, 현재 서울에서 모 보험회사 소장님으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맹렬 여성입니다. 밤하늘을 날아서 우리들 곁으로 온 친구에게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현재 거제도에 살면서 우리들의 만남을 위해 배를 띄웠습니다. 샛터에 남연순씨를 소개합니다. 아울러 이 만남의 여행을 허락해준 훌륭한 남편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항상 우리들의 기억 속에 교장선생님의 예쁜 따님으로 기억되는 전춘희씨를 소개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소개가 진행되자 모두들 어린 시절로 돌아가 새로운 재잘거림이 시작되었다.

"다음은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 한 이불을 사용하는 배수자씨를 소개합니다. 늦게나마 친구들의 축하를 받고 싶습니다.

"그러자 뜨거운 박수소리와 수군거림이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친구, 뜻밖이란 표정의 친구, 각양각색의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왠지 나는 자랑스러웠고 모두들 부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설령 나의착각이라고 해도 좋았다. 모두들 호기심어린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눈빛을 가진 김맹화, 현직 대학교수라고 소개하자 더 큰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 시절 가장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대학교수가 되기까지는 숱한 역경과 노력이 있었으리라.

모두들 자랑스러운 친구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공무원 회사중역이 있고, 건축업 관광업 보석 방주인 등 각계각층에서 나름대로 용하게들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호기심을 한바퀴 돌아 인사를 끝내고 미리 준비한 회칙도 통과시키고 임원진을 선출했다.

회장은 배불뚝이 사장 용수가 맡고, 회장이 지명하는 총무는 나에게 맡겨졌다.

부회장 및 감사는 시골학교의 특징인 지역을 안배하여 선출했다. 회장으로 선출된 용수의 인사말 차례가 되었다. 그는 항상 종업원들 앞에서 연설한 때문인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가며 아주 멋지게 인사를 하였다. 한마디로 듬직한 회장감이었다.


▶ 격식이 필요 없는 편안한 모임

"우리들의 만남의 목적은 만남 그 자체입니다. 우리들의 즐겁고 보람된 만남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습니다."이쯤에서 형식적인 식순을 끝내고 어떤 모임이라도 그렇듯이 한 잔의 술이 돌고 나면 으레 마이크를 차지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들의 모임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이크를 잡은 이은희(현재 치과의사)는 한마디 한마디에서 풍기는 폼이 어디서 많이 경험한 솜씨였다. 한사람씩 지명해서 노래를 부르게 하고 찬조금까지 유도하고 있었다. 목이 터져라 불러대던 망향의 노래로부터 가장 먼저 배운 노래 `학교종이 땡땡'까지 모두들 잘도 불렀고 춤도 추었다.

(이젠 됐어. 첫 만남은 성공이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첫 만남을 평가하고 수고했다는 인사를 수없이 들으면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헤어졌다. 정말 멋있는 만남이었다. 어떤 만남보다도 격의나 격식이 필요하지 않았고, 더욱이 고향 냄새 물씬 풍겨 더 좋았다.

무엇보다 한꺼번에 많은 친구를 얻어 부자가 된 기분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르리라.


<하편>

동창회가 끝난 뒤 며칠 동안 많은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왔고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도 다음에는 꼭 참석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나는 그 날의 감정을 더듬어 감사의 편지를 썼다.


엄마 아빠 되어

다시 만난 고향의 까마귀,

모습은 변했어도

향기는 그대로였습니다.

같은 골짝 물 먹고 자라서일까

왠지 당신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재잘거림으로

추억을 노래하며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허둥대던 세월 속에

묻혀버렸던 옛 이야기

이 제사 끄집어내어

서로의 모습 비춰 보며

새로운 둥지를 엮어 갑니다.


우리들의 첫 만남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나는 조그마한 보람을 가질 수 있었다.

그 후로 친구들 상호간에 연락도 자주 하고 서로의 정보를 제공하고 의논하는 상대가 되었다. 우리는 왜 진작 만나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가 될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한 친구들이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사귄 소중한 친구임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 왜 진작 만나지 못했는지 후회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두 번째 만남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친구들이 참석하고 더 보람 있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면서 모두들 기대가 컸다. 회장의 염려와 부회장의 협조 하에 두 번째 만남을 위한 노래가 시작되었다.


친구야,

도리산 자락에도 봄이 왔겠지.

이맘 때 면 쑥 캐던

단발머리 소녀가 생각나고

진달래 아름 꺾어 달음 하던

까까머리 소년이 그립습니다.

인생의 중턱에 걸터앉아

오가다 마주칠 때

수줍게 미소 짓던 예쁜 친구도 만나보고

진달래 동산에서 짓궂은 친구가 불어대던

분홍빛 휘파람소리 다시 들으면서

길섶 민들레처럼이나 아름다운

옛 추억 깔고 앉아

봄의 길목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


두 번째 만남을 준비하는 일은 회장과 친구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첫 만남 때보다 훨씬 수월했다. 많은 친구들의 연락처도 확보되어 그동안 작성된 명부를 토대로 동기회 수첩도 제작하고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기다림과 설렘으로 두 번째 만남의 날을 맞이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을 몇 번이고 쳐다보며 원망해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러나 그도 묘안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모임을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진행하기로 결론짓고 약속장소로 일찌감치 출발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고 보니 더 많은 친구들이 참석했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그래, 그래서 우리는 친구야. 가장 소중했던 친구인데도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긴 세월을 헤어져 있었던가.


▶ 만날수록 보고 싶은 친구

친구야 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야. 촌놈들이 힘겹게 경쟁하고 이만큼이나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내 고향 들녘의 황소를 닮았기 때문이리라.

때로는 긴 눈썹으로 세상을 가리고, 때로는 큰 귀 흔들어 유혹의 소리 떨쳤으리라.

오직 한 통의 여물을 얻기 위해 숨겨진 주인의 채찍을 의식하며 묵묵히 밭을 갈았으리라.

친구야, 이제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추억을 되새김하며 먼 훗날을 위해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야지. 두 번째 만남의 분위기는 좀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회장의 인사가 있었고 새로운 참가자들의 소개와 인사가 있었다.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나온 철희는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근간에 독립하여 무역업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 인사말을 부탁했더니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난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이렇게 여러 친구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첫날밤을 생각하던 결혼 전날보다 더 떨렸고 가슴 설레였습니다. 오늘의 만남을 주선한 여러 친구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 정말 좋습니다. 정말 좋아요. 좋습니다. 좋아요."모두들 큰 웃음과 긴 박수로 그를 환대하였다. 철희가 불러준 `옛 생각'은 아마도 그동안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리라. 모두들 한 잔의 술에 옛정을 듬뿍 타서마신 탓일까. 기분들이 좋아 보였다.

대학교수인 맹화가 마이크를 잡았다. 사회적 위치로 가늠하면 아주 근엄하고 보통사람들이 접근하기에 부담스러운 교수님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친구들을 의식해서인지 누구보다 서민적인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맹화가 사용하는 말은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문용어가 아니라 어릴적 귀에 익은 말투로 옛 추억을 노래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고무줄을 잘라먹던 이야기며, 학교 뒷산에서 땔나무를 주워 난로를 피우던 이야기며, 선생님들의 이야기들을 가슴 뭉클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자랑하고픈 우리들의 친구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렇게 노래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시계는 늦은 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서야 미소를 교환하며 춤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제각기 나름대로의 율동으로 실내는 온통 춤의 열기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고향에서 농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숙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대충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사별하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위로를 하여야 할까. 이렇게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보니 문득 먼저 가신 남편 생각에 그동안 짓눌려 있던 감정이 폭발했을 것이다.

그래서 친구가 좋고 더더욱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옛 친구가 좋은 것인가 보다.

부모형제 앞에서도 숙이는 그런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겠는가. 가장 부담 없는 친구, 내 모든 것을 털어 보일 수 있는 친구, 그 친구가 초등학교 동창생인가보다.

급기야 숙이는 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내를 찾았다. 울고 있는 숙이의 등 뒤에서 아내가 같이 울고 있었다.

이게 친구인가보다. 조금의 질투심도 없이 다독거려주고 있는 내 아내가 정말 자랑스러웠고,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두 번째의 만남은 진정한 친구의 의미를 맛보게 해주었다. 그 이후 여자 친구남편으로부터 격려 전화도 있었고, 가족 모두 만나게 할 수 없느냐는 건의도 있었다. 물론 남자 친구의 예민한 부인으로부터 오해의 전화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새로운 활력을 찾았고 하나의 기다림을 보듬어 안을 수 있어 좋았으리라 믿는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세 번째 만남인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질게도 무덥던 올 여름, 과연 이 더위 속에 모임을 가질 수 있을까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회칙에 정해진 3개월만의 만남은 취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과 협의하여 여름날의 만남의 노래를 불렀다.


친구야!

당신에게만은 꾸밈없는 몸짓으로 다가서서

때 묻지 않은 옛 노래 부르고 싶소.

당신한테서 어린 내 모습 비춰볼 수 있어 좋고

고향 내음 물씬 풍겨 그래서 더 좋소.

뒷산 마루에 소 풀어놓고 머루랑 다래랑 따서 먹던

그 여름날의 추억을 당신한테서 되찾고 싶소.


안내장을 발송하고 후회도 많이 했다. 무덥다는 핑계로 이번 모임은 취소하는 것인데 너무 무리한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뜨거운 햇살 속에서도 만남의 설렘은 숨쉬고 있었고 만남의 시간은 다가왔다.

참석률이 저조할 것 같아 걱정이 앞섰고 그 기다림의 시간은 더 길게만 느껴졌다.


▶ 어린 적 추억담으로‘화기애애’

그러나 친구들은 땀을 훔치며 찾아와 주었고 모두들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회장이 불의의 화재로 인해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그 와중에서도 모임을 걱정하여 적절히 불참 사유를 전해달라고 하였다. 회장이 참석하지 못한 것은 분명히 해명이 필요한 노릇이었다.

"회장이 어제 저녁 공장의 화재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 용수는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현명하게 대처하리라 믿습니다."친구들의 걱정 어린 눈빛이 보였고 걱정하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자연히 분위기가 어색해졌고 표정들이 어두웠다. 그 순간 역시 분위기 파악을 잘 하는 희야가 나서 어릴 적 추억을 담은 달콤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난 말이야, 초등학교 때 윤주를 짝사랑한 것 아니야. 그런데 순진한 윤주는 그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수자하고 열애에 빠져 결혼한 것 아니야."앞뒤가 뒤바뀐 특유의 서울 말씨로 수다를 떨자 한바탕 웃음과 함께 분위기가 살아났다. 모두들 짝사랑했단다.

아! 그래. 이것이 고향 친구야. 어릴 적 친구는 무슨 말인들 못하리. 그래 실컷 떠들어라. 그리고 마음껏 웃어라. 모두들 한 잔의 술로 흥을 돋우며 노래와 춤으로 즐거움과 우정을 쉬임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이렇게 추억을 한 바퀴 돌다보니 동기생 120명 중 71명의 명부가 작성되었고, 모두들의 추억으로 엮어 가는 우리들의 둥지는 날로 옛 모습을 찾고 있다.

친구야!

박자가 없는 노래.

가사가 없는 노래.

체면이 없는 노래.

꾸밈이 없는 노래.

우리 모두 영원한 합창으로 만남의 노래를 부르자.


▶ 당선소감 <안윤주>

당선 소식을 접하고 창 밖을 보니 침묵으로 천년을 버티어 온 앞산 마루가 청아한 가을 하늘과 맞닿아 살아 움직이고 있다. 능선을 따라 옛 친구가 달려와 손 흔들어 환호하고....예쁜 딸애가 환한 미소로 나를 맞는다.

내 아내의 몸짓이 예전과는 달라 보이고 걸려오는 축하 전화에 나는 작은 흥분마저 느꼈다.

공모에 응했던 가상한 나의 용기에 놀랬고 ,당선소식에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내 딸애에게 아빠로서의 새로운 면을 보여줄 수 있어 매우 기쁘다.

그리고 만남의 노래를 부르게 했던 동기생 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나의 글이 우리들의 새로운 둥지에 따스한 깃털이 되고 자그마한 지휘봉이 되어 영원한 만남의 노래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직도 소식을 전하지 못한 그리운 친구들이여!

우리 모두는 가슴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김영수 홍영지 곽홍기 정현구 선생님, 못난 제자들이 이제야 철들어 선생님을 모시고 싶어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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