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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독립운동]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 및 호국정신 문화제 개최

[영해 독립운동]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 및 호국정신 문화제 개최

3.17일부터 18일 이틀간 영덕 영해면 로타리 일원에서 "영해 3.18 호국정신문화제"가 개최된다.
애향동지회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일제시대 한강이남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중 최대규모인
영해 3.18만세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후세에 계승하고자 추진된다.


영해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 영해 3.18만세운동으로 점화된 사건으로서 3월 18일(음력 2월 17일)


영덕군
영해면 장날을 영해면민을 중심으로 축산면, 창수면, 병곡면 지역 일반 민중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던 경북지역 최대 독립운동으로
당시 현장에서 사망 8명, 부상 16명을 비롯해 196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185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영해지역의 3.18 독립만세운동은 기미년 3.1 이전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체계적이고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은 3월 18일 영해면 성내리에서 시작되어 병곡면, 창수면, 축산면에
이르기까지 영덕군 북부 4개면 전체에서 대규모 독립만세의거가 일어났다.


의거의 발단은 지품면 낙평일의 야소교(耶蘇敎,기독교) 북장로파 교회의 전도사(助事)인
김세영의 전 구세군 참위 권태원을 만나 전국에서 일어난 3.1 독립만세운동 의거의 배경과 당위성과


영덕면에서 만세의거를 일으키도록 권유를 받고, 병곡면 송천리로 와서 기독교 전도사인 정규하,
권상호, 남효직, 남여명, 박휘락 등을 만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다수 동지(同志)들을 규합하는 한편, 정규하로 부터 영덕에서 보다 영해 장날에 맞추어
대규모 만세시위의거를 일으키는 것이 좋겠다는 제의를 받아, 마침내 동해안 최대상권이었던
영해의 영해장날인 3월 18일 오후 1시경 영해시장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의거가 시작되었다.


또한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이상화, 서삼진, 조영환, 권영조, 김원발, 손영세, 남교문, 김치운 외
많은 우국지사들도 그들의 살고 있는 동리의 동민들이나 친인척, 혹은 기독교 신자들을 설득하여,
영해면 성내리에서 한국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의거를 일으켰다.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의 결과는, 사망자 8명인데 병곡면 원화리의 신동송(申東松),
각리의 임창목(林昌穆) 영해면 묘곡리의 이회동(李會東), 영해면 괴시리의 이해술(李海述),
병곡면 이천리의 최재곤(崔在崑) 등 5명의 신원만이 밝혀지고 나머지 3명은 신원이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부상자 16명 중 영해면 원구리의 권정돌(權正乭), 묘곡리의 김도식(金道植) 연평리의 김위석(金渭錫),
원구리의 남만진(南晩鎭), 괴시리의 남효량(南孝樑), 대진리의 이두관(李斗寬), 병곡면 원황리의 김위환(金渭渙),
창수면 가산리의 남홍진(南洪鎭) 8명만이 신원이 밝혀졌으며, 나머지 8명은 알 수가 없다.


경찰서에 구금된 자는 창수면 인량리의 박주락(6개월), 영해면 대진리의 배계환(3개월),
병곡면 이천리의 황종운(6개월)이다. 1919년(己未年) 독립만세 운동의거로 독립유공자는


경상북도가 1,408명으로 전국에서 명실상부하게 제일 많은 것을 보면 의거(義擧)의 고장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경상북도를 세분하여 영해지역의 경우, 안동 다음으로 136명이 포상되어,
영해는 구국이념(求國理念)이 투철한 향리(鄕里)라고 할 수 있다.
 


영해는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 때문에 왜구와 잦은 항쟁으로 수시로 왜구를 격퇴 시키고
성을 쌓아 만반의 대책을 강구하였는데 대격돌의 결사 항쟁사건으로서 기록상 최초는
관노 의병(義兵) 이옥(李沃)이다.


그 다음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서기 1592년 4월 14일~1598년)시 직접 왜적이 침입한 지역이 아닌데도
경주, 영천, 대구 및 문경 또는 창녕 등지에 지원하기 위하여 영해 의병(義兵)을 일으켜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7년 동안 경주성 및 영천성 복성 전쟁과 경주 문천희맹(慶州 川會盟),
문경 당교회맹(聞慶 唐橋會盟), 팔공산 상암회맹(八公山 上庵會盟), 화왕산 성진회맹(火旺山 城陳會盟) 등
다섯 곳에서 왜적과 결사 항쟁한 난고 남경훈(蘭皐 南慶薰) 선생이다.


조선말(1890년대) 의병대장 벽산 김도현 장군(碧山 金道鉉), 이수악(李壽岳), 신돌석 장군(申乭石 將軍)이
영해, 영양, 삼척, 울진, 평해, 청송, 안동 지역까지 맹활동을 하였다.
그후 일제 강압기에는
수 많은 독립 운동을 하다가 드디어 1919년(己未年) 3월 18일 영해 장날을 기점으로 하여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하였다.
영해지역의 의병(義兵)과 독립운동자(獨立運動者)는
대체로 유림(儒林, 선비)이며 기미년 독립운동 시는 기독교인과 같이 항왜(抗倭) 투쟁을 한것이 특징이다.
<자료 출처: 寧海遺錄>